집
앤과 저는 작년에 시애틀을 많이 다녀 왔는데, 주로 나이 드신 부모님들의 건강문제로 다녀 왔습니다. 시애틀은 정말 우리의 고향입니다. 우리가 자라난 곳이고, 고등학교 때 우리는 만났고, 결혼을 했고, 일을 하던 곳이고, 세 자녀가 태어난 곳 … 시애틀입니다. 무엇보다도 6년 동안 떠났다가 시애틀에서 11년 목회를 한 곳입니다. ‘고향’이란 단어를 들으면 바로 시애틀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변합니다. 시간이 흘러서 제가 다닌 초등학교와 고등학교는 없어졌습니다. 정들었던 장소들이 없어졌습니다. 슈퍼소닉 프로농구팀이 몇 년 전에 다른 곳으로 옮겨 갔습니다. 도시에는 굉장히 커진 경량의 철도망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제가 자란 집은 아직도 존재하지만, 주위의 집들은 거의 다 새로 지어졌습니다. 저의 어머니도 제 동생 집 근처의 교외로 이사했습니다. 그런데도, 시애틀이란 단어를 들으면 … 저에게는 고향이 떠오릅니다.
고향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좋던 싫던 감정이 벅차 오릅니다. 고향에 대한 모든 기억이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기 때문에 좀 복잡합니다. 어떤 기억은 매우 나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끌리고, 편하고, 연결이 됩니다. 제가 자란 집의 뒷골목을 들어서면 이미 저는 고향집에 와 있습니다. 저는 수백만 번 언덕을 오르락 내리락 했습니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강아지를 쫓아 가기도 하고, 자전거를 타거나 운전을 하면서 말입니다. 제가 오래 된 벚나무가 있는 드라이브웨이에 들어서면서, 차 바퀴에 깔린 자갈 소리를 들으면 … 이미 저는 고향집에 와 있는 겁니다. 고향은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이야기할 때, “고향집으로 돌아간다”라는 말을 합니다.
진짜 핵심은 “고향집”이란 것이 주소나 건물 이상의 것이 있는 것입니다. 제가 어린 시절의 집을 운전하여 지나가면, 저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저희 딸이 대학생 때 이 사실을 확실하게 알려 주었습니다. 우리가 딸이 자랄 때 미국 전역을 몇 번 이사를 다녔는데, 딸은 지혜로운 관찰을 하였는데, “집이란 것은 우리가 함께 있을 때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말이 진실이라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우리가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우리는 달 위에 있는 것 같고 고향이라고 느껴집니다. 고향은 무엇보다도 감정과 추억과 특별히 관계가 중요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집은 고향이 아닙니다, 장소는 고향이 아닙니다. 사람들, 관계, 그리고 당신이 사랑하는, 또는 사랑받는 사람들을 보살핌과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보스니안 작가인 알렉산더 헤이먼은 말하기를 ‘집이란 사람들이 네가 부재할 때 거기에 없는 것을 알아차리는 곳이다.’
이 말은 제가 최근에 누가복음 15장의 돌아온 탕자 이야기를 다시 읽을 때 새로운 생각이 떠 오르게 만들었습니다. 탕자의 고통은 집을 떠난 것만이 아니라, 집을 나올 때 침을 뱉고 떠난 것이었습니다. 그의 인생이 바닥에 떨어졌을 때 멘탈이 무너져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상상해 봅니다-비록 그는 이미 고향집을 단순히 먹고 자는 곳으로만 여기었을 테 지만요. 왜냐하면 그가 이미 아버지와의 관계가 완전히 깨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탕자를 환영하는 아버지의 기쁜 영접과 아버지의 용서는 탕자가 그냥 건물이 아닌 고향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그런데, 형의 불만은 고향집이 아니라 다시 건물로 바꾸게 만듭니다.
탕자의 비유를 다시 생각해 보면, 고향집은 친절함의 표상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보살필 때나, 부재할 때 알아차리는 방식과 태도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 더 많은 사람들의 삶 가운데 고향집으로 돌아온다는 사고방식이 결여된 것을 깨닫게 됩니다. 특별히 이 나라 새 행정부가 수십 만 명의 사람들을 내 쫓고, 법적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고 불법으로 못 들어오게 담을 쌓는 것을 준비하는 것이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런 환경 속에서 어떻게 친절을 베푸는가를 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아마도 외국인과 망명자, 이방인들, 고아와 과부 들에게 베푸는 규정에 대한 수십 개의 성경구절을 찾아 보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규정들은 거처할 장소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고향집… 사람들과의 관계를 가질 곳을 찾아주는 것입니다.
진리는 집을 짓는 것은 벽돌과 시멘트가 아니라,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 만들어 진다는 것입니다. 프레드릭 부에크너의 소책자 고향집을 찾아서, 에는 이런 글이 담겨져 있습니다: “ … 집이란 단어가 가져다 주는 첫번째는 장소이고, 그 다음에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람이고 그리고 아마도 궁극적으로 어떤 한 사람일 것입니다.” 아니면, 제가 한 사람을 더하고 싶습니다. 모든 가르침과 행동에서 살아서나 죽어서나 부활해서나 예수님은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우리에게 진정한 고향집을 가르쳐 주고 계셨습니다.
아마도 오즈의 마법사 도로시가 루비 슬리퍼를 함께 부딪치면서 반복해서 하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 ‘집만한 곳은 없어’
그리스도의 평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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