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바다 가운데서의 리더쉽
최근에 대화를 나눈 목사님들과 크리스천 리더들로부터 들은 말이 있습니다: “지금은 매우 힘든 시기입니다.” 미국에서의 대변동, 즉, 정치, 리더쉽, 세계의 정세, 사람들에 대한 열악한 취급 등은 이끌어 나가기에 너무 힘들게 합니다. 미국과-미국내의 교회-가 이처럼 짧은 시간 내에 양극화 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현재 리더쉽의 모습은 몇 년 전의 그 모습과는 본질적으로는 아니더라도 모양새에서 너무도 달라졌습니다. 거친 바다의 모습입니다.
담임목사나 교회 지도자들은 이러한 때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굉장히 혼돈되는 일입니다. 대부분의 우리 교회들은 정치적이나 신학적으로 아니면 둘 다 다양한 교인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청색 교회 (더 진보적)나 적색 교회 (더 보수적)가 아니라 보라색 교회들입니다. 우리 교인들은 섞여져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무슨 말을 하든지 (혹 안 하든지) 누군가는 상처를 받습니다. 설교가 그렇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하지만, 크리스챤 공동체의 리더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4장 1절에서 리더쉽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일꾼. 이 단어를 사도 바울은 특별히 huperetas를 사용하였는데, “일꾼”이라고 번역도 되지만,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노젓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 시대의 지중해 갤리선은 노젓는 자들을 사용했고, 참고로서 하인리히 불링거 (16세기, 제 2 스위스 신앙고백서)가 적기를: “사도는 교역자를 노젓는 사람이라 부르면서, 이 노젓는 사람은 그의 눈을 키잡이에 고정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오늘 조정경기와는 마찬가지로, 키잡이 (가장 작고, 노를 젓지 않지만 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는 노젓는 자들의 속도와 방향을 정하는 중요한 목소리와 결정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키잡이로 삼고 노젓는 자들입니다. 오늘날 주님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동굴에 숨지 않고 예수님만 바라볼 수 있습니까? 여기 제가 담임목사로서 생각하는 몇 가지를 제시합니다:
하나님이 성경에서 당신에게 주신 말씀을 설교하라.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지요. 읽고, 연구하고, 기도하고, 창조적으로 생각하는 것, 이것들은 우리가 들을 수 있는 방법 들이고, 결국 우리가 하나님이 성경에서 주신 것을 설교할 수 있는 것이지요.
설교단에서나 밖에서나, “정치 이슈”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을 피하지 말라. 비록 장로님이 목사님의 설교가 너무 정치적이라고 지적하면서 영적인 것에만 집중해야 한다고 말할 때라도 피하면 안 됩니다. 저는 이 시대의 대부분의 문제들은 정치적 문제가 되기 이전에 이미 영적인 문제들이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실제 인생에 적용을 하려고 한다면, 가난이나 인종차별, 노숙자 문제, 총기 사건, 낙태, 성적 문제, 결혼, 전쟁, 물질주의와 환경 문제 등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들이 정치적이라고 이에 대하여 설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로서 일상생활에서 다루어야 할 영적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 문제들은 그저 정치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상처받는 것에 너무 신경 쓰지 마시고, 반대 의견도 표현될 수 있는 환경에서 일하면 됩니다. 제가 너무 진보라고 교회를 떠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신학적인 문제 중에서 모든 것을 저와 동의하는데 한 개의 문제가 달라서 교회를 떠난 분들이 있었습니다. 오직 만장일치만이 이런 문제를 없앨 수 있다는 것이 자명합니다.
우리는 우리나라와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침묵을 할 수 없습니다. 만약 마틴 루터 킹 박사/목사님이 인종차별을 성경적 근거로 제시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도 짐 크로우 시대에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1930년대의 독일 교회, 즉, 순수한 동질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대량 학살하는 히틀러 정책에 동조하거나 침묵을 한 것을 닮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 나라는 현재 많은 사람들이 없어도 되는, 개탄할 만한, 추방 대상으로 사람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이 한결같이 말하는 것은 이방인이나 외인이나 억압받는 자나 가난한 자나 고아나 과부 그리고 늙은이들을 돌보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알고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사람들을 존중해 주지 않는 결정이나 지도자들을 볼 때에 우리는 침묵해서는 안 됩니다.
이 질문이 중요합니다: 주님, 우리 교인들이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교인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질문입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말씀하시곤 했던 것이 인식된 필요는 과장된 것이고, 사람들이 진짜 그들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않는 한 믿을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분명히 우리 커뮤니티는 저를 포함하여 그들과 함께 기도할 수 있는 지도자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위해서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담임목사나 지도자가 해야 할 중요한 것 중 하나는 교인들이 기도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일 좋은 가르치는 방법은 그들과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위의 여섯 가지 포인트는 제가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예수님만 바라보면서 나온 결과가 아니라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더라도, 본문의 강도, 뉴앙스 그리고 열정을 다루기가 힘들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값을 치룰 수도 있습니다. 그런 때에 누가 이끌어 나갈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초점을 맞출 수 있습니까? 저는 최근에 제 이웃인, 순복음교회 지도자이고 업자인 다릴로부터 좋은 지혜를 얻었습니다. 지난 주에 우리 집들의 뜰 사이에 있는 커다란 울타리를 정리하고 있을 때 그의 전화가 울렸습니다. 전화를 한 사람은 그의 교회에 다니는 젊은 사람이었고 무슨 문제를 결정하는데 도움말을 듣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다릴이 대답하는 말을 들었는데, 마치 이와 같았습니다: “만약 지금 헷갈리면,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으로 돌아가서 그대로 해”
저는 그 말이 예수님만 바라보라는 격려로 들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착한 노젓는 사람이 바다가 거칠 때에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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